2008년 06월 10일
파이돈
Platon, Phaidon
구조:
구조:
- 도입 57-59
- 크산티페와 소크라테스 59-62
- 문답
- 問1.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은 불의가 아닌가? 62-63
- 答1. 죽음에 대한 철학자의 자세 64-69
- 問2. 영혼 역시 필멸의 존재가 아닌가? 69-70
- 答2. 전생의 증명 70-77. -- 탄생 70-72, 상기 72-77
- 問3. 전생의 존재가 후생을 보증하는가? 77
- 答3. 후생의 존재 77-84. -- 영혼불멸 77-80, 인과응보 81-82, 해방으로서의 죽음 82-84
- 問4. 육체는 영혼의 필요조건인가? 기계론적 반론 84-86
- 問5. 영혼은 장생할 뿐이 아닌가? 86-88
- 問1.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은 불의가 아닌가? 62-63
- Interlude 88-89
- 형상
- 이성에 대한 신뢰 89-91
- 答4. 영혼이 육체에 우선함 91-95
- 答5. 형상의 보편성 95-102
- 이성에 대한 신뢰 89-91
- 죽음
- 형상의 불변성 102-107
- 사후세계 107-108
- 지구의 형태 108-115
- 형상의 불변성 102-107
- 소크라테스의 죽음 115-118
《파이돈》은 플라톤이 대화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밝히는 유일한 편이다. 실제로 우연히 그 때 아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수작으로 볼 수도 있다. 대체의 대화편과 달리 여기에서는 지혜로운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받는 대상이며, 여기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의 주장은 소크라테스적이라기보다 피타고라스적이다. 여기서 어디까지가 역사적 소크라테스이며 어디까지가 플라톤 창작인가를 구분하기는 힘들다. 소크라테스적 지행합일은 앎이 곧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 즉 앎은 행동에 대한 필연성을 제공한다. 이 소크라테스-플라톤적 프레임워크 위에서는 이론과 실천의 문제 자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역으로 앎이 수반되지 않는 행위는 지식episteme이 아니라 속견doxa에 기반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참된 앎은 육체의 감옥에 갖혀 있는 영혼으로서는 성취할 수 없다. 이 앎은 감각aisthesis로 인식되는 개별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편자로서의 형상eidos에 대한 앎이며, 이에 대한 지식은 자연히 선험적인a priori지식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진리는 초세계적 보편자들의 권역, 즉 레테Lethe의 저편에 존재한다. 모든 사람이 상기anamnesis를 통해 망각lethe을 넘어 진리aletheia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의 상기론은, 영혼의 윤회라는 신비적인 설명을 벗겨내고 나면, 모든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이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러한 보편자로서의 형상에 호소하지 않고는 기본적인 언어생활조차 불가능하다. 오직 개별자들만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으면 컵a,컵b, 컵c..를 모두 포함하는 "컵"이라는 명사조차 사용할 수 없으며, "이것"으로 지시한다 해도 이 "이것"이 모든 개별자를 포함하는 궁극적 보편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육체의 한계 때문에 이에 대한 지식은, 수학적으로 말하면 진리에 무한히 접근하는 극한값에 불과할 뿐 결코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앎은 실천에 대한 필연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참된 앎을 획득하고 나면 더 이상 자기반성이 필요 없는 단순한 실천만이 남게 된다. 이 신적인 정신은 (마치 《일리아스》의 신들처럼) 자기의 본질에 따라 무반성적으로 단순히 행위할 뿐 영원히 아무 것도 배우지 않고, 변화하지 않으며, 되돌아보지 않는 정신이다. 절대를 얻어 절대 그 자체가 된 정신은 반성할 필요가 없다. 이를 추구하는 인간이 philosophos고, 이지혜를 얻어 더 이상 사랑할 필요가 없는 자가 sophos다. 이것은 신적이지만, 동시에 동물적이기도 하다. 명예, 그리고 분노라는 지극히 단순한 기준을 절대로 선언하는 아킬레우스를 테티스는 "신적"이라 하지만 아폴론은 "짐승"이라 단정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면 그 자신도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헥토르를 죽인다. 필멸자로서 신적인/짐승적인 이성에 따라 행동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막사에 손수 찾아온 노쇠한 프리아모스를 만나며 파괴된다. 아킬레우스는 그를 통해 자신의 노쇠한 아버지를 회상하며, 스스로의 인간존재를 다시 자각한다. 전쟁기계 아킬레우스를 파괴하는 것은 프리아모스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스스로를 아킬레우스에 비유한다. 그 역시 인간의 필멸성을 넘어서고자 한 신적인 정신을 추구한,sophos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일리아스》의 마지막 순간에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 최초의 반성을 행한다- 그는 프리아모스를 죽이고자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제한다. 소크라테스는 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반론에 대해 자신의 절대를변호하며, 최후의 순간에 그 동안의 모든 것에 대한 반성을 행한다. 두 사람 모두 그 직후 죽는다. 필멸자가 신적 정신에도달하려 하다가 이르는 파멸, 그것이 소크라테스와 아킬레우스를 연결시키는 비극tragodia이며 이것이 그들의 죄 아닌 죄,오만hybris인 것이다. 이후에도 많은 영웅heros들이 이렇게 절대에 도달해 무반성적, 맹목적인 의지를 행사하다가 비극적 결말에 도달한다: 신들에 대한 복종을 절대로 규정한 안티고네부터 서로를 절대로 규정한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비극적 영웅들은 그 존재 자체가 주변을 전혀 돌보지 않는 민폐이고, 까딱하면 신이 아니라 짐승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자기반성의 부재는 참된 앎을얻어 sophos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파괴해야 함을 의미한다. 자유는 인간적인 것이다. 신적인 이성은 절대를 알고, 그의필연성에 따라 단지 의지를 행사할 뿐이다. (니체적 의미에서의 초인Übermensch, 그리고 힘에의 의지Wille zurMacht)
필멸자로서의 자아는 결코 참된 앎에 다다르지 못한다. 참된 앎에 도달하면 필멸자의 자아는 절대 속에서 파괴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주체를 깨끗이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미치지 않고서는 그 길을 따라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말빨만 세우면 본래적 의미에서 지식인sophistes이 되는 거지. 여기에서 문제를 재설정할 필요가 생긴다. 정말로 그것은 레테의 너머에, 세계를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가?
# by | 2008/06/10 14:27 | Sententiarum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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