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e days.


1. I'm not yet dead, just busier.

2. My laptop died, and I am yet to decide which model I should buy.

3. I'm considering either closing and removing or resetting this blog.

by Noir | 2009/03/27 09:36 | Monologue | 트랙백 | 덧글(3)

소설책 두 권.

아멜리 노통Amélie Nothomb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튜브의 형이상학(Métaphysique des tubes)》


자신의 0살에서 3살까지를 다룬 자서전적 소설. ...이라고 하는데, 그 때의 기억이 남아있다는 거 자체가 가능한가? 난 3살은 고사하고 8, 9세 이전의 기억도 흐릿하다 못해 막연한 이미지만 남아있고, 어떤 에피소드를 기억해 낼 능력은 없다. 내가 온전히 기억해낼 수 있는 기억은 적어도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10세 정도부터이다. 내 에피소드 기억이 평균 이하인 건 알고 있으니 내 기준에서 말할 순 없겠지만, 0세부터 3살까지라... 부모의 증언이나 다른 기록들을 참고했겠지만, 그 아기 화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온전히 성인의 언어이다. 즉 노통은 유아의 관점에서 글을 쓴 게 아니라 성인의 관점에서 회고하며, 자신의 유아기를 재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그리 믿을만한 게 되지 못하지. 이런 짓을 해 버리면 자신의 기억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픽션이 기억을 대체해 버리게 된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픽션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일까. 일본에서 나고 자라던 두살 반 아멜리는 스스로를 일본인(Japonaise)로 규정하는데, 과연 그게 두살 반의 결정일까 아니면 성인 아멜리의 자아정체성 규정일까?

다이 시지에Dai Sijie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Balzac et la Petite Tailleuse chinoise)》


문화혁명과 재교육을 경험한 중국인이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쓴 소설. 샨사의 《천안문》과 겹치지 않을까? 중국인의 펜이 프랑스어로 중국을 비판하는 소설을 쓴다면 프랑스의 잘나신 분들이 좋아하겠지. 소설 자체는 괜찮은 편이지만 집필에 있어서 전략적인 선택이 들어갔을 것이다.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못 갔음에도 "반동 지식인"으로 몰려 재교육받으러 산골로 들어가는 주인공들은 그곳에서 금지된 발자크를 만나는데.. 아마존 프랑스와 알라딘의 서평을 비교해 보면 프랑스인들은 이걸 독서와 자유에 대한 예찬 정도로 받아들이는 듯한 반면 한국인들은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 금서로 분류된 책들을 떠올리는 것 같다만 내게 이 책은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기보다 그냥 책에 대한 책, 책에 대한 욕망에 대한 책, 그리고 그 욕망에 따르는 환멸에 대한 책이다. 내겐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주제다. (내 일상이다 제길.) 다만 작중에 거론되는 책들을 들춰보고 싶은 생각이 들긴 한다. 선전문학의 대표로 거론되는 김일성의 《꽃파는 처녀》와 그에 대립되는 안티테제로서 발자크.

안경잽이의 금지된 서양문학 콜렉션을 훔치러 들어가는 두 주인공. 화자는 신고할 것이 두려워 그 중 일부만 빼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 친구 루오는 "결심한déterminé" 톤으로 말한다. "나는 저걸 다 읽고 싶어Je veux les lire tous!" 서물에 대한 욕망 때문에 신고되면 공안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문자는 악마의 발명품이지.)





DALF C1 시험을 치렀습니다. 수험생 모드는 임시 해제로군요.
아마 재수할 가능성이 꽤 높을 듯 싶긴 합니다.
아무튼 부담없는 펄프나 읽으면서 휴식.

by Noir | 2008/11/30 01:28 | Sententiarum | 트랙백 | 덧글(5)

한국어 공부는 끝이 없다.

한국어로 된 여러 웹페이지나 아티클 따위를 인터넷에서 보다 보면 참 그 개념을 잡기 어려운 단어들이 있다.

레포트. 나는 그게 대체 어떤 형식의 글인지 감을 잡을 수도 없다. 어떤 것은 소논문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개인적인 정서가 들어간 감상문처럼 보이며, 레퍼런스가 없는 것부터 인용양식을 지키는 것까지, 사실을 조사하는 것부터 심지어 픽션을 써내는 것까지 보았다. 정해진 형식이 없는 글은 대개 수필이라 부르지 않던가? 그렇다고 해서 레포트와 수필이 동의어는 아닌 것 같다. 누가 나더러 레포트 써 보지? 라고 하면 괴로울 것 같다.

문단. 한자로는 文壇. 어느 사전에는 "문인(文人)들의 사회"라고 정의된다. 일단 단(壇)이니 어딘가 올라서는 곳일 것이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올라선 사람들이 文人들일 것이며, 그들이 이루는 사회가 문단일 것이다. 나로선 그 壇이 무엇인지도, 文人이란 또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壇에 오르는 자격증명을 필요로 한다면 단지 읽고 쓸 줄 아는 것만으로 文人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석학. 한자로는 碩學. 대가리 클 석에 배울 학이니 대가리가 배움으로 가득 찬 자를 말하는 단어라고 어설프게 짐작해 본다. 세상에 學의 종류는 많으니 석학의 종류도 많을 것이요, 외부인인 나로서는 대학에 학과가 개설된 것은 다 學이겠거니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호텔경영, 비서, 경호원, 관광 등 무수한 분야에서 경력이 쌓이고 배움으로 머리가 가득차면 석학이 되는 게 아닐까. 이렇게 보면 한국은 석학이 많은 나라일 것이다.

한국어 공부는 끝이 없다.

by Noir | 2008/11/24 01:46 | Monologue | 트랙백 | 덧글(5)

볼테르 소설 읽기

딱딱한 것 읽기도 지겨워지고 있어 볼테르 소설집을 죽 읽었다. 《캉디드》 빼면 번역도 없는 듯 하지만 어쨌건 스포일러 잔뜩 포함 주의.

세상 돌아가는 대로, 바부크의 환상(Le monde comme il va, Vision de Babouc) (1746)
볼테르 초기 중단편. 스키타이인 바부크는 지니 이투리엘의 명을 받고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한다. 이투리엘은 그의보고에 따라 페르시아를 멸할 것인지 보존할 것인지 결정하겠다고 하는데, 각 챕터에서 바부크의 페르시아에 대한 인상은 계속변화한다. "야만인"을 등장시켜 문명사화에 대한 코멘트를 하게끔 하는 당시의 흔한 장르 중에서도 초기에 속하는 것. 찬양과경멸을 동시에 느끼다가 결국 스키타이인은 페르시아에 동화되어 버린다.

코시-상타, 큰 선을 위한 작은 악(Cosi-Sancta, un petit mal pour un grand bien) (1746)
선을 위해 악을 행할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도덕철학에 대한 볼테르식 반론이다. 남편, 형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본의에어긋나게 세 번의 간통을 저지르고 본의에 어긋나게 성녀로 추앙받은 주인공 코시-상타의 이야기. 당시만 해도 아직 "이럴 수도있는 거 아냐~?" 라고 말하면 그게 반론이 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자딕, 혹은 운명에 대하여(Zadig ou la destinée) (1747)
분량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초기 대표작 중 하나. 학문부터 무술까지 모든 능력치 최고인 주인공(먼치킨 소설의 효시인가?)이 그잘난 능력 때문에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게 되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도망친 여왕의 애완견과 왕의 말을 찾는 부분에서는동물이 지나간 흔적만 보고 그 관찰에 따른 귀납적인 유추가 등장하는데, 《장미의 이름》 도입부에서 윌리엄 수도사가 보지도 않은말에 대해 떠드는 부분을 연상시킨다. 오만가지 이교도들이 모여 자기들이 옳다고 떠드는 장면에서 자딕이 결국 다 같은 믿음이아니냐고 하는 부분은 당시의 자연종교 논쟁, 그리고 이후 볼테르 자신의 《관용론》과 연결해서 읽어볼 만 하다. 이후의《캉디드》와 달리 결국 해피엔딩이다.

멤논, 혹은 인간의 지혜에 대하여(Memnon, ou la sagesse humaine) (1750)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여성을 멀리하고 술 따위에 탐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주인공 멤논이 바로 그날 여성에게 실수하고술마시고 도박하여 집을 잃고 싸움끝에 한쪽 눈까지 잃어버리는 이야기. 나중에 수호천사같은 게 등장해서 인간이 완벽한 지혜에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떠든다. 그러나 그렇게 써제끼는 볼테르 자신은 전지적 시점에서 그런 지혜로운 말을 적고 있다는 게미묘하다면 미묘한 점. 소설, 특히 전지적 시점에서 쓰여진 소설은 서구에 있어서는 근대 이후의 산물이다.

미크로메가스, 철학적 이야기(Micromégas, histoire philosophique) (1752)
지구에 도착한 외계로부터의 방문자가 등장하는, SF의 효시로도 거론되는 작품. 인간보다 훨씬 거대하고 수명도 길며 5감을 넘어선수백개의 감각기관을 가진 외계인들의 관점에서 인간이 얼마나 찌질한지를 보여주는, 보다 보면 그런대로 재미는 있지만 이쯤 오면사실 좀 식상하다. 미크로메가스가 오만 종류의 철학자들에게 "너희의 영혼은 어떤 것이냐"라고 묻고, 오만 종류의 답변이 쏟아져나오고, 그들은 미크로메가스를 위해 지구인의 철학을 정리한 책을 만들어 선물하지만 그 내용은 텅 비어있다.

플라톤의 꿈(Le Songe de Platon) (1756)
플라톤, 특히 구체적으로 《티마이오스》에 대한 까댐이다. 데미우르고스가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신들로 하여금 자기들 나름대로 세상을 창조하도록 만들고, 이세계를 창조한 데미고르곤(-.-)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거지같은 세상을 만들어 동료들에게 놀림받는가 이야기. (이자식 애초에《티마이오스》를 끝까지 읽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불완전한 세상을 만든 데미고르곤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면 그 데미고르곤을만든 데미우르고스, 즉 조물주 역시 불완전하다는 걸까? 아래 《캉디드》와 함께 라이프니츠를 겨냥한 공격이 아닐까 싶다.

실제 《티마이오스》에서도 인간을 포함한 구체적인 동식물등의 창조는 데미우르고스의 1차 창조물 중 하나인 신들에게 맡겨진다.데미우르고스가 직접 창조하면 불멸자가 되어버리나, 2차 창조의 과정을 거치면 필멸자 인간을 만들 수 있다. 즉 데미우르고스는의도적으로 인간을 유한자로서 창조한다. 볼테르가 냉소적이 되는 건 이 부분인데, 《멤논》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는(보다 높은 신적 관점에서 볼 때) 전체적으로 조화롭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쯤 오면 그러한 논변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캉디드 혹은 낙천주의(Candide, ou l’optimisme) (1759)
일단 대표작. 길기도 제일 길고. 다소 개판으로 요약하자면 신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식은 무한정 존재할 수 있지만,신은 본성상 선하며, 따라서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최선의 세계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충족원인이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소불합리해 보이는 일들도 사실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 라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을 정면으로 까대는 소설.(등장인물 중 하나인 팡글로스 박스는 라이프니츠의 화신이다.) 뭘 해도 더럽게 꼬여 안 풀리는 등장인물들, 주인공 캉디드는 일이하나씩 터질 때마다 "팡글로스는 여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라며 독백한다. 재미있는 건 정말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최선의세계"로 묘사되는 황금향 엘도라도가 존재하며, 캉디드가 거기에 도착하지만, 애인을 찾기 위해서 자기 발로 걸어나온다는 점이다.(거기서 끝냈다면 《자딕》과 다를 게 없다) 클라이맥스는 팡글로스가 인물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닥친 많은 불행들에도 불구하고"라이프니츠가 틀렸을 리가 없다!"라고 외치며 고집을 부리는 부분. (진짜 영웅은 팡글로스인가?)

볼테르가 가장 종종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대상은 종교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를 당대에 가장 잘변호하는 철학자가 라이프니츠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라이프니츠와 볼테르의 관계는 나중에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에서재탕된다.)

랑제누, 실화(L’Ingénu, histoire véritable) (1767)
《세상 돌아가는 대로》, 《미크로메가스》에 이은 외부인의 관점에서 본 문명사회 시리즈. 휴론 인디언 랑제누가 브르타뉴에도달하는데, 앞의 두 작품과 달리 사실 랑제누는 원래 프랑스인이고 캐나다에서 일찍 부모를 잃어 휴론 인디언들에게 길러졌을뿐이라는 사실이 처음 몇 챕터 안에 밝혀진다. 즉 그는 반문명 반야만의 상태에서 시작하며, 이 "고귀한 야만인"은 위그노,얀센주의자라는 이단죄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나이든 얀센주의자 고르동으로부터 문학을 배우다 오히려 역으로 고르동을설복시켜버린다. 여기서 공격의 대상이 되는 건 루소가 아닐까 싶은데... (추가로 당시 사법체제의 부패. 감옥에 갖힌 랑제누를풀어내기 위해 마드므와젤 생티브는 자기 몸을 뇌물로 주는데, 거기서 끝난다면 《코시-상타》와 다를 바 없지만 생티브는 결국 그일로 자살한다. 여기서 볼테르가 뭘 의도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 정절개념에 대한 찬사는 아닐 것이다.)

사십푼짜리 남자(L’Homme aux quarante écus) (1768)
그리 강한 플롯구조를 보이지 않고 주인공 사십푼과 다른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구성되어 있다. 아무래도 가장 초기의 정치경제학비판에 해당하는 책이 아닐까 싶은데, 그리 정교하지는 않지만 상업을 통한 잉여자본 축적, 사회적 분업관계 속에서 수도사의 위치,세금, 국제무역 등 여러 주제에 대한 시니컬한 언급들이 들어가 있다. 아마 볼테르 자신은 자기가 뭘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르고있었겠지... 볼테르는 비판적이라기보다 그냥 냉소적이라는 게 적절하다. (그는 뭐가 걸리든 일단 닥치고 까고 본다.)

바빌론의 공주(La princesse de Babylone) (1768)
바빌로니아 공주가 유니콘을 타고 중국의 북경에 도착해 황제와 4천명의 만다린에게 영접받는 정도의 난감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건차치하고 (이쯤하면 독전파계인데...) 《랑제누》이후 점점 쇠약해지기 시작한 걸까, 노년의 볼테르가 필사적으로 장면을 밀고가는게 이전작들과 달리 너무 작위적이다. 중간에 인물들이 영국에 다다랐을 때 보여주는 영국에 대한 찬사는 《철학서간》에서의 젊은볼테르의 출발점일까.

아마베드의 편지(Les lettres d’Amabed) (1769)
편지소설. 베나레스(바라나시)의 인도인 커플의 눈으로 본 유럽인, 특히 가톨릭, 특히 수도사들의 모습. 그런 걸 순진한 척 쓰는걸 보면 때로 가증스럽기까지 한데... 《랑제누》가 비문명인의 관점에서 본 문명사회였다면, 《아마베드》에서의 문명인은인도인들이고, 서구인들이야말로 야만인으로 비추어져 있다. 노인네가 독이 좀 많이 올랐군... 그는 정말로 가톨릭이 싫었던 것같다.

흰 소(Le Taureau blanc) (1774)
우화. 《바빌론의 공주》에서 절정에 이르는 엽기적 구성이 사라지고 많이 차분해졌다. 이집트의 왕은 7년 전 느부갓네살에게 왕위를찬탈당했다가 느부갓네살이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다시 왕좌에 돌아오고, 느부갓네살의 이름을 말하는 것 자체를 죄로 만든다.그러나 그 느부갓네살은 공주의 연인이었고.. 해석하기에 따라서 《관용론》과 연결해 읽을 수도 있겠고, 고정테마인 종교비판의영역에서 읽을 수도 있겠다.

역사적 이성예찬(Éloge historique de la raison) (1774)
알레고리. 서두에 언급되는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패러디한 게 아닐까 생각되지만 에라스무스를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이성(Raison)과 그 딸 진리(Vérité)가 시대에 따라 각 지방을 돌며 코멘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볼테르가단순히 비판하고 적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걸 넘어서 어떤 긍정적 비전을 제시하는 몇 안되는 소설이다. "법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그것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제니 이야기, 혹은 무신론자와 현자(Histoire de Jenni, ou l’athée et le sage) (1775)
제목은 제니 이야기지만 중요 내용은 그 아버지 프라인드와 다른 두 사람과의 대화로 되어 있다. 영국 국교도 프라인드는 가톨릭사제와의 토론에서 사제를 간단히 격침시킨다. (대화편 이렇게 쓰면 안 된다. 상대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것만큼 대화편의 질을떨어트리는 건 없다.) 그러나 이후 무신론자와의 토론에서는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가면서 결국 신에 대한 믿음 자체는 버리지 않는걸로 끝난다. 무신론의 문제를 직접 대놓고 다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봐야 할까?

대가리 싸매고 읽어나간 이유는 간단하다. 적어도 이만큼은 읽었다고 자부할 만한 양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깡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난 그렇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줄요약: 18세기 사우스파크.

by Noir | 2008/11/13 07:50 | Sententiarum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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